끓이던 원유, 값싼 막으로 분리…에너지·탄소 30% 넘게 줄인다

■고동연 KAIST 교수팀 ‘차세대 상온 분리막’ 기술 네이처 게재비싼 선택층 없이 ‘PAN 막’ 활용해 원유 경질성분 걸러무거운 성분은 침착, 나노급 통로로 나프타·휘발유 통과 기존 배관에 모듈 추가 가능…100년된 증류식 대체 길 터원유 정제는 현대 산업의 가장 기본적인 공정 중 하나다. 원유를 정제하면 휘발유·경유 같은 연료뿐 아니라 플라스틱·합성섬유·세제·포장재·의약품의 원료가 나온다. 원유 정제의 첫 단계는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끓인 뒤 끓는점 차이에 따라 성분을 나누는 증류 공정이다. 100년 넘게 정유 산업의 표준이었지만 막대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피하기 어렵다.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은 값싼 고분자 분리막으로 실제 원유에서 경질 성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25일 밝혔다. 기존 원유 분리막의 낮은 처리 속도와 비싼 선택층 코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원유를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나누는 차세대 기술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정유 공정에서 ‘끓이지 않는 분리’가 중요한 것은 에너지와 탄소 배출 때문이다. 전 세계 정유 공장이 상압·감압 증류에 쓰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 이상으로 추산된다. 1GW급 원전 약 130기가 1년 내내 생산하는 전력에 해당한다. 여기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연간 1억 6000만 톤이 넘는다. 특히 원유를 끓이는 데 필요한 고온 열에너지는 규모가 워낙 커 전기로 대체하기도 쉽지 않다. 설비 개조와 대규모 전력 공급이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바닷물을 막으로 걸러 담수를 만드는 역삼투처럼 정유 공정도 ‘끓이기’에서 ‘거르기’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져왔다. 하지만 원유는 분리막으로 다루기 쉽지 않다. 수천 종의 탄화수소가 섞여 있고 점성이 높으며 무거운 기름 성분이 막을 쉽게 오염시킨다. 그동안 학계는 표면에 매우 얇은 ‘선택층’을 입혀야만 분자 수준의 정밀 분리가 가능하다고 봤다. 선택층은 실제로 물질을 걸러내는 핵심 기능층이지만 제조가 어렵고 비싸며 면적을 키울수록 결함이 생겨 산업 현장 적용에 한계가 있었다.고동연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사진=고동연 교수KAIST 연구팀은 비싼 선택층을 만들지 않고 그동안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겨졌던 다공성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 막만 사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PAN은 아크릴섬유 등에 쓰이는 비교적 흔한 고분자 소재로 막의 구멍이 원유 분자보다 크다. 기존 관점대로라면 원유 성분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빠르게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 실험에서는 원유 속 무거운 성분들이 막 내부의 미세한 구멍 벽면에 달라붙으면서 2㎚(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의 좁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분리막 성능을 떨어뜨리는 오염 현상으로만 여겨졌던 성분 침착이 오히려 정교한 나노 크기의 통로를 만든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자기제한적 기공 수축’ 현상으로 설명했다. 구멍이 완전히 막히는 것이 아니라 원유 성분과 막이 상호작용하며 가벼운 성분만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형성한다는 의미다.실험에서는 원유 속 가벼운 성분을 빠르게 걸러내는 성능도 확인됐다. ‘아라비안 라이트’ 원유를 대상으로 했을 때 분리 속도는 기존 원유 분리막 최고치보다 23배 이상 빨랐다. 막을 통과한 원유에서는 나프타·휘발유처럼 끓는점이 200도 이하인 가벼운 성분의 비중이 25.1%에서 52.0%로 높아졌다. 반대로 무거운 기름 성분은 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걸러졌다. 연구팀은 28일 동안 연속으로 실험해도 분리 속도와 성능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설명했다.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규명했다. 분석 결과 막 내부에는 탄소가 17~33개 이어진 긴 탄화수소 성분이 주로 쌓여 있었다. 이 성분들은 막의 아주 작은 구멍 안에 자리 잡으면서 가벼운 성분만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유지했다. 겉으로는 원유 성분이 막을 막아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유와 분리막이 함께 새로운 거름망을 만들어낸 셈이다.해당 기술이 실용화되면 원유를 끓여 성분을 나누는 증류 공정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거대한 증류탑을 헐어내거나 전체 공정을 멈추지 않고도 기존 배관 사이에 분리막 모듈을 추가해 일부 경질 성분을 먼저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정유 설비를 활용하면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낮출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연구팀은 공정 모사 결과 기존 증류 공정에 분리막을 결합할 경우 에너지 사용량은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쓰임새도 다양하다. 나프타를 분해하기 전 원하는 성분만 골라내거나 파라자일렌·BTX 같은 핵심 석유화학 원료를 분리하고 고급 윤활기유를 정제하는 공정까지 정유·석유화학 곳곳에 적용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제조에 쓰인 용매 회수, 친환경 연료 정제 등 미래 산업으로도 확장 가능하다.다만 실제 정유 공장에 적용되기까지는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고동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작은 크기의 분리막을 잘라 실험실에서 성능을 확인한 단계”라며 “산업 현장에서 쓰려면 막의 면적을 크게 키워도 같은 성능이 유지되는지, 여러 개의 막을 묶은 모듈 형태에서도 장기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 검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고 교수는 “나프타와 방향족 화합물 분리,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소재와 용매 회수 등에도 활용될 수 있다”며 “작은 실험실 막에서 확인한 성과를 실제 공장에서 쓸 수 있는 큰 분리막 모듈로 키우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상용화의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원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