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천재냐 안락한 평범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258년 英 왕립미술원 최연소 천재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관습미술에 저항한 '라파엘전파'성가족, 거친 노동현장에 옮기고오필리아, 절정의 천재성 발휘결혼 뒤 느슨·분방한 화풍으로상업광고 등 돈·명성 안위 좇아추문·비난에도 대중인기 누리고준남작 작위 받은... 등록 2026-06-26 오전 7:40:00 수정 2026-06-26 오전 8:07:30 가 가 페이스북 트위터 메일 프린트 KAKAO URL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1851∼1852).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 속 오필리아를 그렸다. 연인 햄릿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실성한 채 들판을 헤매던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숨을 거두는 장면을 바탕으로 했다. 반쯤 벌어진 오필리아의 입술은 물에 잠기는 마지막까지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는 희곡의 설정을 반영했다. 섬세한 주변 환경의 묘사, 화면에 흐르는 비감까지 밀레이의 천재성과 그가 결성한 라파엘전파의 철학이 집약된 걸작으로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으로 꼽힌다. 캔버스에 유채, 76.2×111.8㎝. 테이트 브리튼(영국 런던) 소장.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열한 살 소년이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었다. 나중에 왕립미술원으로 이름을 바꾼 그곳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청년들이 엄격한 석고 데생과 인체 소묘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들어설 수 있던, 미술 분야에서 제일 높은 수련장이었다. 그 문을 넘어선 자들 중 가장 어린아이가 바로 1840년 12월에 입학한 것이다. 그 최연소 기록은 오늘에 이르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 그는 그렇게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일찍 빛을 드러낸 천재였다. 그러나 이 어린 천재는 머지않아 비난과 추문, 야유의 한복판에 던져진다. 1848년 열아홉의 밀레이는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과 ‘라파엘전파 형제회’를 결성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 이후 굳어버린 이상화의 관습을 거부하고, 라파엘 이전에 그랬듯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한 점의 흙먼지와 한 올의 풀잎까지 정직하게 그리겠다는 젊은 저항이었다. 그 저항의 가장 도발적인 선언이 바로 밀레이의 붓에서 나왔던 것이다. 1850년 왕립아카데미 전시에 내걸린 ‘부모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849∼1850)였다. 그림 속 성가족은 더 이상 후광에 둘러싸인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수선한 목공소, 바닥에 흩어진 톱밥과 대팻밥, 못에 손을 찔린 붉은 머리의 소년 예수, 그 상처에 입을 맞추려 몸을 굽힌 어머니, 거친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어진 요셉. 거룩함을 가난한 노동의 진실 속으로 끌어내린 밀레이의 그림을, 빅토리아 시대 점잖은 관람객들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다. 비난의 선봉에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1812∼1870)가 있었다. 자신이 펴내던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디킨스는 어린 예수를 두고 “목이 비뚤어진 채 훌쩍거리는, 잠옷 차림의 흉측한 빨강머리”라고 조롱했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저열한 선술집이나 영국의 천한 진 가게에 세워 둬도 그 추함이 단연 괴물처럼 도드라질 여인”이라고 격하게 야유했다. 소문이 어찌나 떠들썩했던지 빅토리아 여왕마저 궁전으로 그림을 가져오게 해 살폈다고 한다. 젊은 천재의 그림이 한 시대의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한 순간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부모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849∼1850). 미술사에서 가장 격렬한 비난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르네상스 대가들이 그렸던 신비롭고 이상화된 성가족을 톱밥이 흩날리는 거친 노동현장 속에 배치했다. 당대에는 혹평을 받았지만 종교적 성스러움이 화려한 천상세계가 아닌 ‘인간의 숭고한 노동과 삶의 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캔버스에 유채, 86.4×139.7㎝. 테이트 브리튼(영국 런던) 소장.자신 옹호한 비평가 아내와 결혼...런던 뒤흔든 스캔들 이 격랑의 한복판에서 당대 최고의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이 밀레이를 위해 펜을 들었다. 1851년 5월 ‘더 타임스’에 두 차례 편지를 보내고, 그해 여름에는 ‘라파엘전파주의’라는 소책자를 펴내 “대담하고 서툴기까지 한 사실주의야말로 새로운 영국 미술이 딛고 설 토대”라고 변호했다. 존경받는 비평가가 젊은이의 편에 선, 한 시대의 미적 판단을 뒤바꾸는 사건이었다. 러스킨의 옹호 속에서 밀레이의 천재성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 절정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 ‘오필리아’(1851∼1852)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아버지를 잃고 연인에게 버림받은 오필리아가 실성해 강에 빠져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가라앉는, 무대에서는 끝내 보이지 않는 그 죽음의 순간을 밀레이는 화폭에 담았다. 그는 실제로 강가에 넉 달을 머물며 물풀과 들꽃 한 송이까지 그대로 옮겼다. 물에 반쯤 잠긴 여인은 두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죽음을 거역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기이한 평온 속에 떠 있고, 반쯤 벌어진 입술은 마지막 노래의 여운인지 이미 멎은 숨인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오필리아를 에워싼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말을 건네는 상징의 언어다. 버드나무는 버림받은 사랑을, 쐐기풀은 고통을, 데이지는 순결을 말하고, 물 위에 흩뿌려진 제비꽃은 젊어서 스러진 자의 정절과 요절을, 핏빛 양귀비는 죽음과 영원한 잠을 가리킨다. 그렇게 이 그림은 처참한 죽음의 장면을 눈부신 생명의 빛깔로 그려낸 역설 위에 서 있다. 자연은 한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무심하리만치 아름답게 피어 있고, 그 무심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오필리아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이 애처롭게 만든다. 50대 중반의 존 에버렛 밀레이.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던 영국 런던 켄싱턴궁 인근 작업실에서다. 1884년 J P 메이올이 촬영하고 제판해 출간한 사진집 ‘예술가의 집’에 실려 있다.그 무렵 러스킨은 자신의 초상을 밀레이에게 의뢰했다. 초상화 의뢰야 대수로운 일이겠는가마는 그들의 운명은 여기에 예기치 않은 반전을 숨겨 두고 있었다. 러스킨은 바위와 급류를 배경으로 자신을 그려 달라며 밀레이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했다. 화가와 비평가, 또 비평가의 젊은 아내 에피 그레이까지 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외딴 산골에 넉 달 가까이 함께 머물렀다. 그러곤 통속소설처럼 밀레이는 러스킨의 아내 그레이를 사랑하게 됐다. 사실 그레이는 열아홉 살에 러스킨과 결혼했으나 부부로서의 관계가 없었다. 그레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로한 바에 따르면 러스킨은 첫날밤 신부의 몸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밀레이의 초상화 여정이 끝난 후 그레이는 러스킨에게 결혼반지와 함께 혼인무효 소송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혼인이 한 번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러스킨의 성적 무능을 사유로 한 소송을 밀어붙였다. 두 명의 의사가 그레이가 여전히 처녀임을 증언했고, 1854년 7월 결혼은 공식적으로 무효가 됐다. 영국에서 이혼이 거의 불가능하던 빅토리아 시대, 한 여인이 자신의 가장 사사로운 굴욕을 세상 앞에 드러내면서까지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이 사건은 런던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간 대형 스캔들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55년 7월 밀레이와 그레이는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무려 여덟 아이를 두며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밀레이의 화풍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풀 한 포기까지 집요하게 좇던 라파엘전파의 정밀함은 점차 느슨하고 분방한 필치로 바뀌었다. 여덟 아이를 거느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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