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유럽' 압박 커진다…완성차·배터리, EU산 룰 새 변수

폭스바겐·스텔란티스·르노, EU에 '70% 현지 가치' 기준 요구중국 전기차 공세에 유럽 생산·조달 보호론 확산현대차·기아는 부품 원산지, K배터리는 소재·핵심부품 현지화 관건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걸려있는 유럽연합(EU) 깃발. ⓒAP/뉴시스[데일리안 = 정진주 기자] 유럽 자동차업계의 '메이드 인 유럽'(Made in Europe) 압박이 국내 완성차와 배터리업계의 공급망 변수로 떠올랐다.유럽 주요 완성차업체들이 EU에서 판매되는 차량의 상당 부분을 역내에서 만들고 조달하자는 기준을 요구하면서다. 유럽에서 차를 파는 현대차·기아는 부품 원산지와 현지 조달망을 따져야 하고 국내 배터리업계는 중국 대체 공급 기회와 소재·핵심부품 현지화 부담을 함께 맞게 될 전망이다.25일 로이터에 따르면 폭스바겐·스텔란티스·르노는 최근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보낸 공동 서한에서 단순하고 명확한 '메이드 인 유럽' 규칙 도입을 요구했다. 이들 3개 그룹은 유럽 자동차 생산의 약 60%를 차지한다.이들이 제안한 기준은 EU에서 판매되는 차량의 70%가 차량 가치 기준 70%를 EU 27개 회원국 안에서 조달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적용 범위도 단순 조립에 그치지 않는다. 엔지니어링부터 제조까지 자동차 가치사슬 전반을 포함한다. 유럽에서 차를 조립하더라도 핵심 부품과 전동화 시스템, 배터리 가치가 역외에서 발생하면 원산지 기준 충족이 까다로워질 수 있다는 의미다.유럽 완성차업계가 이처럼 원산지 기준 강화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 커진 위기감이 있다. 이들은 전략 분야의 기술 격차와 글로벌 경쟁 압박, 높은 에너지·제조·규제 비용으로 유럽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현지 생산 전기차에 대한 인센티브, 배터리 생산 지원, 소형차 규제 유연성 확대를 요구한 것도 유럽 내 제조 기반을 지키기 위한 조치다.중국 전기차 공세도 유럽의 보호론을 자극하고 있다. 전동화 수요가 살아나는 가운데 립모터, 체리, BYD 등 중국 브랜드도 빠르게 판매를 늘리고 있다. 지난 5월 EU와 영국,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지역 신차 등록은 115만2523대로 전년 동월 대비 3.6% 늘었다. 배터리 전기차(BEV) 등록은 39.1%,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는 13.2%, 하이브리드는 8.2% 증가했다. 유럽 입장에서는 전기차 시장 회복의 수혜가 역내 업체보다 중국 업체로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셈이다.EU가 추진 중인 산업가속화법(IAA)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IAA는 전기차와 배터리 등 전략 산업의 역내 생산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법안이다. 전기차 공공조달과 공적지원 대상에 EU 역내 최종 조립과 주요 부품의 EU산 원산지 요건을 붙이는 것이 골자다.한국자동차연구원은 최근 산업분석 보고서에서 IAA 발효 6개월 후 전기차 차체는 EU에서 조립돼야 하고 배터리를 제외한 차량 전체 부품 공장도 가치의 70% 이상이 EU산이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발효 3년 뒤에는 전동화 파워트레인과 주요 전자시스템에도 EU산 비중 요건이 붙는다.IAA에는 중국을 겨냥한 외국인직접투자(FDI) 심사 장치도 포함돼 있다. 투자액이 1억유로를 넘고 투자자 국적국이 해당 분야 글로벌 제조역량의 40% 이상을 보유한 경우 고용, 지분, 연구개발(R&D), 현지 조달 등 EU 내 실질 가치창출 요건을 따지는 방식이다.전기차와 배터리 분야에서 글로벌 점유율 40%를 넘는 국가는 사실상 중국뿐이다. 중국 업체가 유럽에 단순 조립공장만 세워 원산지 기준을 우회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국내 완성차업계도 영향권에 있다. 유럽은 현대차·기아의 주요 판매 시장이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 5월 유럽 권역에서 8만6444대를 판매했다. 현대차는 3만7062대, 기아는 4만9382대를 기록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누적 판매도 43만4964대에 달했다.EU에서 판매되는 차량에 원산지 기준을 붙이는 논의가 커지는 만큼 현대차·기아의 유럽 판매·생산 전략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럽에서 차량을 조립하더라도 핵심 부품과 전동화 시스템을 한국이나 아시아에서 들여오는 비중이 높으면 EU산 요건 충족이 어려워질 수 있어서다.완성차업체 입장에서는 가격과 품질, 브랜드 경쟁력에 더해 부품 조달망이 새 변수로 떠오른다. 유럽 판매 기반을 유지하거나 키우려면 현지 조립뿐 아니라 부품 원산지와 현지 조달 비중까지 공급망 전략에 반영해야 하는 구조다.배터리업계에는 기회 요인이 있다. EU가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려는 만큼 유럽 생산거점을 갖춘 한국 배터리업계가 대체 공급자 역할을 키울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삼성SDI와 SK온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유럽 생산거점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완성차업체들이 중국산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고 현지 공급망을 강화하려 할수록 K배터리와의 협력 여지도 커질 수 있다.과제는 배터리 셀을 넘어선 현지화다. 한자연은 IAA가 배터리 셀뿐 아니라 양극활물질과 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 주요 구성요소의 EU산 요건을 단계적으로 강화하는 구조라고 분석했다. 유럽에 셀 공장을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소재와 핵심부품, 관리시스템까지 어느 범위에서 EU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는 셈이다.한국 기업에는 중국보다 일부 완충 여지도 있다. 한국은 EU와 자유무역협정(FTA), 정부조달협정(GPA)을 체결하고 있어 중국과 같은 조건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다. EU가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과정에서 한국·일본 배터리·소재·부품 기업이 대체 공급자나 파트너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다만 한국산 부품이나 배터리가 자동으로 EU산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어떤 범위의 부품과 소재를 EU산으로 인정할지, FTA·GPA 체결국에 어느 정도 예외나 완충 장치를 둘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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