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역사 '거장들의 화랑' 갤러리현대, 젊은 작가 8명 불렀다

갤러리현대 단체전에 나온 박정혜 작가 작품 전시전경. 인상주의, 표현주의, 단색화, 민중미술…. 우리가 기억하는 미술사에는 늘 그 시대를 지배하는 미술의 유행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작가들에게는 그런 깃발이 없다. ‘지배적인 양식이 없다’는 게 현대미술의 주요 특징이기 때문이다.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단체전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이런 시대를 반영한 단체전이다. 1980년 이후 태어난 작가 8명을 세 개 층에 나눠 모았다. 전시 제목은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의 1979년 영화에서 따왔다. 위기가 닥치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알아서 피하라는 뜻으로, 따라갈 미술 사조 없이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미술계를 반영했다. 정진화, 침대 위의 세 사람, 2020, 종이에 먹, 74 × 993 cm 전시에 참여한 8명은 쓰는 재료도, 다루는 주제도 전부 다르다. 예를 들어 지하 1층 전시장에 작품을 낸 정진화(40)는 동양화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는 직접 만든 종이에 먹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다만 작품의 느낌은 전통적인 동양화와는 거리가 있다. 먹의 번짐을 활용해 경계선을 흐릿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랑이나 기억, 그리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표현한다. 반면 조이솝(32)은 도발적인 조각과 회화를 통해 성(性) 정체성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생각을 표현했다.한선우(32)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작품을 만든다. 그는 온라인에서 이미지를 긁어모아 포토샵으로 붙인 뒤 AI로 빛과 그림자를 다듬는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캔버스에 빔프로젝터로 쏜 뒤, 붓으로 한 땀 한 땀 옮겨 그린다. AI가 몇 초 만에 만든 화면에 사람의 시간과 노동을 입히는 것이다. 전시에 나온 '귀가'에는 폐허가 된 근대 건축물 사이로 등에 따개비를 잔뜩 붙인 정체불명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 존재에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때 캐나다로 이주한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한선우, 귀가, 2026, 린넨에 유채, 200 × 300 cm 1층 전시장의 김주영(35)은 조각과 설치를 만드는 작가다. 독일 뮌헨에서 활동하는 그는 실제 비행기와 자동차 부품에 성당 유리창에 쓰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붙여 작품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는 비행기 창틀에 스테인드글라스를 결합한 '오후 내내 떠 있던 조류' 등이 나왔다. 한곳에 머물지 않는 비행기 부품은 떠도는 삶을, 한자리를 오래 지키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정착한 삶을 상징한다. 같은 층에 작품을 건 박민하(42)는 추상화가다. 그는 붓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바탕색을 20~30번 칠한 뒤 왁스를 섞은 유화 물감으로 그 위에 사각형들을 그린다. 화면에 반복해 등장하는 사각형은 빛의 흔적과 기억의 잔상을 표현한 것이다. 김주영, The algae kept floating all afternoon, 2026, 항공기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LED, 131 × 49 × 30 cm 2층에는 여성 작가 세 명의 추상화 작품이 걸렸다. 박정혜(37)는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리는 작가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들은 수국에서 출발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에 수국을 선물받아 오래 들여다본 게 계기가 됐다. 박정혜는 "수국은 꽃받침 자체가 꽃덩어리가 돼 마치 꽃인 것처럼 위장하는 식물"이라며 "겉과 속이 다른 이 꽃에 여러 갈래로 쪼개진 오늘날의 세상과 내 모습을 빗댔다"고 설명했다.안현정(40)은 바느질을 통해 그림을 만드는 작가다. 조각난 천을 재봉해 서정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혜인(45)은 장미를 통해 사람의 삶과 죽음을 표현했다. 안현정, Rendezvous_Warm White and Snow,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 × 97 cm 나이를 제외하면 8명 작가의 공통점은 딱 하나, 유행을 좇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작업을 밀고 나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시장은 상업 화랑이라기보다 미술관에서 열리는 ‘젊은 작가전’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1970년 문을 연 뒤 한국미술의 대표 거장들을 소개해온 갤러리현대가 이례적으로 젊은 작가 단체전을 열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2년마다 젊은 작가 기획전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람은 무료, 전시는 오는 26일까지.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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