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블랙홀’ 반도체, 빛과 그림자 [스페셜리포트]
인공지능(AI) 인프라 설비투자 경쟁이 반도체 산업 지형도를 확 바꿔놨다. 과거 반도체 수요 중심축이 PC·스마트폰·서버 교체 사이클이었다면, 지금은 빅테크 주도 초대형 데이터센터 증설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AI 가속기 탑재량이 급증하면서 GPU와 주문형반도체(ASIC)뿐 아니라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기판, 전력반도체, 냉각·전력 인프라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병목이 빚어진다. 칩 수준 경쟁이 아니라 설계·제조·메모리·패키징·전력·장비가 맞물린 AI 인프라 확보 전쟁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일각에서는 과거 2000년대 중국이 막대한 고정자산 투자로 글로벌 단위생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던 것에 빗대어 20여년 만에 AI로 생산요소 대이동이 본격화됐다는 진단도 내놓는다. AI는 지식노동 생산비용을 낮추는 ‘저렴한 지능’이지만, 이를 구현하려면 데이터센터·전력·냉각·네트워크와 반도체라는 천문학적인 물리적 인프라가 필요하다.이런 변화는 투자 지형도 180도 바꿔놨다. 개별 반도체 관련 주식은 물론, 상장지수펀드(ETF) 같은 간접투자 상품으로도 막대한 유동성이 밀려든다. 메모리 중심·AI 인프라 ETF부터 채권혼합, 커버드콜, 액티브, 레버리지 ETF까지 전략도 제각각이다. 전문가들은 AI 인프라 투자 사이클이 최소 수년간 이어질 것으로 보면서도 빅테크의 천문학적인 ‘빚투(설비투자·CAPEX)’와 ETF발 수급 변동성 확대 등에 대해서는 우려 섞인 시선을 던진다. 우리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하이퍼 불(Hyper Bull·초강세장)’을 구가 중인 가운데 역대급 랠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이 쏠린다. 사진은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종가가 표시돼 있는 모습. (연합뉴스)‘삼전·닉스’ 아직 고점 아냐이익 대비 시총 할인 여전우리 반도체 산업이 유례없는 ‘하이퍼 불(Hyper Bull·초강세장)’을 구가 중인 가운데 역대급 랠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이 쏠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매출·영업이익 모두 최고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운다.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강세장으로 실적이 폭발적으로 개선됐다는 진단이다. 다만, 반도체 시장 수요예측이 난제라는 점에 비춰 자칫 과거처럼 돌발 변수로 가격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는 신중론도 있다.현재로서는 반도체 초호황에 대한 우려는 거의 읽히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업황을 판가름할 지표로 ▲메모리 고정거래가격(기업 간 대량 거래) ▲빅테크 설비투자 가이드라인 ▲재고자산 회전율 등을 꼽는다. 이런 지표 가운데 경고음은 일절 관찰되지 않는다.낙관론 배경으로는 반도체 산업 구조 변화가 지목된다. 무엇보다 AI 추론을 위해서는 서버 D램, 고용량 DDR5, 모바일 LPDDR 등이 필요해 수요 저변이 확대됐다. 스마트폰·PC·차량 등 ‘온디바이스 AI’ 확산으로 전력 효율과 저지연이 핵심인 모바일 LPDDR 수요도 급증했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을 평가하는 잣대가 PBR(주가순자산비율)에서 PER(주가수익비율)로 변한 것에도 메모리 산업을 바라보는 시각 변화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과거 메모리 산업은 실적 변동성이 커 이익 지속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사이클 업종이었다. 호황기 땐 이익이 급증하지만 공급 증설이 뒤따르면 가격이 급락하고 적자로 전환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증권가는 특정 연도 순이익에 배수를 매기는 PER보다, 장부가치와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기준으로 저점과 고점을 판단하는 PBR 방식을 선호했다. 즉,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자산가치 대비 얼마나 싸거나 비싼가”로 평가받는 제조업·사이클 업종에 가까웠다.AI 메모리 사이클은 이 공식마저 뒤엎었다. HBM은 기업 간 계약(B2B)으로 장기공급계약이 가능해 이익 가시성이 높다. 공급 측면에서도 공정 난도와 첨단 패키징 병목 탓에 과거처럼 단기간에 공급이 폭증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런 변화 속 주요 증권사들은 속속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목표주가 산정 방식을 PER로 변경하며 목표주가를 줄줄이 올려 잡는다.시장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연간 기준 엔비디아와 글로벌 영업이익 1위 자리를 겨룰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편다. KB증권은 올해 엔비디아 영업이익을 357조원, 삼성전자를 327조원으로 예상했다. 2027년에는 삼성전자 488조원, 엔비디아 485조원으로 삼성전자의 역전 가능성을 점쳤다. SK하이닉스도 2026년 영업이익 전망치 251조원으로 글로벌 4위, 내년 358조원 안팎 영업이익으로 글로벌 3위로 예상됐다.그럼에도 글로벌 반도체 선두기업과 시가총액 격차는 여전히 크다. 삼성전자 시총은 엔비디아의 19%, TSMC의 57% 수준에 불과하다. SK하이닉스 역시 이익 체급은 글로벌 최상위권으로 올라섰지만, 시총 할인은 여전하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번 실적은 절대 규모 외에도 메모리 사이클상 이제 막 중간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과거 사례를 볼 때 판매가 상승 이후 물량 확대 구간이 겹치는 2026년 4분기에서 2027년 2분기 사이 실적이 가파르게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펄펄 끓는 ‘소부장’전공정 → 후공정으로AI 서버가 고전력·고발열 구조로 진화하면서 반도체 산업 수혜 범위도 HBM에서 ‘소부장(소재·부품·장비)’으로 확산했다.반도체 산업에서는 생산 공정별로 업황 체감 시점이 달라 시차 효과가 뚜렷하다. 설비 증설에 긴 시간이 걸리는 구조 때문에 장비 업체들이 업황 후반부 뒤늦은 수혜를 누릴 때가 많다. 메모리 가격이 상승하고 수요가 급증해도 반도체 기업은 곧바로 생산능력을 늘릴 수 없어 초기 호황기 땐 기존 설비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가령, 메모리 판매량이 늘면 불량 검사나 패키징을 담당하는 후공정(後工程) 업체들이 낙수효과를 누린다. 기존 설비에서 생산된 칩 물량이 늘어나면 테스트·패키징 물량도 함께 증가한다. 반면, 노광·식각·증착 장비나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전공정(前工程) 소부장 업체는 상황이 다르다. 이들 기업은 반도체 업체들이 신규 설비투자를 결정하고 장비 발주가 이뤄져야 수주를 기대할 수 있다. 신규 팹 건설과 장비 반입까지 통상 1~2년가량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설비투자 사이클 초기에는 전공정 업체 주가가 먼저 움직이고 후공정 업체는 시차를 두고 덜 오른 주가를 채우는 패턴을 보인다는 평가다.현재 전공정 업체 주가는 이런 사이클 패턴을 선반영하며 퀀텀점프했다는 시각이 많다. 국내에서는 HPSP, 원익IPS, 주성엔지니어링, 유진테크, 피에스케이 등 공정 미세화·HBM 투자와 맞물린 장비주가 주목받는다. 주가 랠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장비주 고점을 논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시각이 우세하다.김록호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2년 동안은 범용 D램 생산라인이 HBM 라인으로 교체되는 전환 투자 중심이었다. 앞으로 설비투자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는 신규 투자다. 대부분 장비 업체는 설비투자 사이클 수혜를 무차별적으로 받을 것”이라 말했다. 김동관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요 반도체 소부장 기업 주가가 상승했지만 여전히 기업가치 고점을 논하기에는 이른 시기”라고 진단했다.HPSP는 고압 수소 어닐링 장비뿐만 아니라 낸드 장비 매출 회복 기대가 높다.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40% 이상 늘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027년 이후부터 파운드리는 물론 D램, 낸드까지 모든 응용처로 장비 공급을 시작할 것”이라 봤다. 원익IPS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모두 고객사로 둔 종합 전공정 장비 업체다. 반도체 장비 매출 비중이 80%를 웃돌아 메모리 투자 확대에 따른 직접적인 수혜를 누린다. 주성엔지니어링은 ALD·CVD 증착 장비 경쟁력을 기반으로 미세공정 확대와 고단화 수혜가 기대된다. 유진테크는 LPCVD·ALD·플라즈마 처리 등 메모리 전공정 장비 포트폴리오를 보유해 D램·낸드 투자 확대 시 이익 급증이 기대된다. 피에스케이는 글로벌 박리(Strip) 장비 1위 업체다.다만, 전공정 업체 주가는 메모리 투자 확대에 대한 민감도가 커 단기적으로는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가령, 삼성전자 주가는 2024년 하반기 5만원대에서 최근까지
원문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