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슈만 로터리에서 통상의 길을 묻다
필자의 사무실은 브뤼셀 슈만 지역에 있다. ‘슈만’이라는 지역명은 전후 국가 간 갈등을 봉합하고 석탄과 철강산업의 협력을 강화해, 현재 유럽연합의 기틀을 마련한 로베르 슈만 장관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 한가운데 있는 슈먼 로터리는 브뤼셀과 유럽 주요 도시를 2시간 내로 연결하고, 집행위원회와 이사회 등 EU의 주요 의사결정 기구가 위치한 유럽의 정치, 행정의 심장부이다. 그야말로 EU 수도로서 브뤼셀의 역할이 압축된 유럽 연결의 상징이다.최근 이곳에서도 흔들리는 글로벌 통상 질서 속 병목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미국의 광범위한 관세 부과, 공급망 전쟁, 중동 지역 불안과 에너지 안보 우려까지 더해지며 지경학적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특히 과거 미국과 EU는 안보와 경제,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서방의 동맹이었으나, 최근 이런 인식이 무색하게 미국은 EU산 자동차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가능성과 유럽 주둔 미국 감축 문제까지 언급하며 EU를 상대로 강한 통상 압박을 가하고 있다.이에 EU 의회와 일부 회원국에서는 미국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며 강경 대응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발 시장 교란과 산업 충격을 최소화하고, 러시아 에너지 의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EU가 또 다른 파고를 만난 것이다.이에 ‘폰데어라이엔 2기’ EU 집행위는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핵심광물 등 미래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목표로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다만 이러한 목표는 유럽만의 힘으로 달성하기 어렵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유럽에 한국은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EU와 공유하고 있다. 한국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미 유럽의 배터리 공급망 생태계의 중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한국에도 EU는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다. 미국, 중국에 이어 3위 수출시장이며 미국과 중국 중심의 경제 블록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EU는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협력 축이기도 하다.무엇보다 양국의 관계는 단순한 교역 관계를 넘어선다. EU와 기본협정(정치), 자유무역협정(경제), 위기관리참여협정(안보)에 이어 최근 디지털 통상협정까지 비유럽권 중에서 4대 영역의 협력 규범을 완성한 유일한 파트너가 한국이다.이번 한-EU 정상회담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개최되었다. 보호무역주의와 지정학적 경쟁이 심화하는 전환기에 가치와 이해를 공유하는 파트너 간 협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한국과 EU는 이미 서로에게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자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다.슈만 로터리에는 매일 EU의 다양한 국가의 번호판을 단 수많은 차량이 교차한다. 때로는 혼잡하고 빠져나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아도 결국 모두 목적지를 향해 연결된다. 지금의 국제통상 질서 역시 마찬가지다. 지속 가능한 번영의 길은 배제가 아닌 협력, 고립이 아닌 연결 속에서 찾아야 한다.여종욱 한국무역협회 구중아본부장 브뤼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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