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보이지 않는 인프라 경쟁

K뷰티 지속 가능한 글로벌 확장 조력자정밀 제조·빠른 물류·실증 임상 ‘삼박자’K뷰티 성장은 브랜드 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이디어가 제품이 되고, 제품이 글로벌 유통망에 올라타고, 효능을 데이터로 입증하기까지 제조·임상·물류 등 산업 전반 가치사슬(밸류체인)이 촘촘하게 맞물려 작동한다. K뷰티가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운 배경에는 이처럼 잘 짜인 산업 생태계가 있다.지난 6월 16일, 서울 용산구 서울드래곤시티에서 열린 ‘글로벌 K뷰티 콘퍼런스 2026’에서 유사한 진단이 나왔다. 로드리고 피자로 로레알코리아 대표는 기조연설에서 “K뷰티 성공을 이끄는 주요 동력은 세계적 수준의 혁신 생태계”라고 평가했다. 한국은 뷰티 산업 밸류체인이 풍부하게 어우러져 있어 아이디어를 완성품으로 전환하는 속도가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르다는 이유에서다. 김성운 실리콘투 대표가 지난 6월 16일 서울 용산구 서울드래곤시티에서 열린 ‘글로벌 K뷰티 콘퍼런스 2026’에서 ‘해외진출 플랫폼의 힘’이라는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윤관식 기자)제품력은 보이지 않는 곳서 완성ODM·원료·규제 대응이 관건K뷰티 초기 성장기를 끌고온 주역은 브랜드였다. 한류 콘텐츠와 톡톡 튀는 콘셉트, 빠른 신제품 출시가 전 세계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시장이 무르익으면서 승부는 다시 제품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제품력은 단순히 ‘성분이 좋다’는 차원이 아니다. 제형과 사용감, 공정의 안정성, 원료 기술, 규제 대응 능력까지 모두 아우르는 종합 경쟁력이다.색조 제품에서는 이 점이 특히 도드라진다. 제형 경쟁력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틴트만 봐도 그렇다. 발림성, 밀착감, 지속력, 착색 정도, 색 표현 하나하나가 모여 소비자 경험을 만든다. 표유미 씨앤씨인터내셔널 크리에이티브솔루션 본부장은 “히트 제형이 곧 브랜드 정체성이 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ODM 업체도 이제 단순 생산 하청을 넘어, 트렌드를 먼저 제안하고 브랜드와 함께 제품을 설계하는 동반자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하이드로겔(물을 머금은 젤 형태의 소재) 전문 ODM 기업 이미인도 비슷한 메시지를 내놨다. 요즘 글로벌 시장에서는 피부에 붙인 뒤 점점 투명해지는 하이드로겔 마스크팩이 인기다. 그런데 하이드로겔은 까다로운 소재다. 온도와 점도, 겔화(액체가 젤처럼 굳는 과정) 조건이 조금만 어긋나도 밀착감과 투명해지는 속도, 사용감이 확 달라진다.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최적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직감이나 경험을 넘어선 정교한 공정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미세한 변수까지 철저히 데이터화해 불량률을 줄이고, 언제나 동일한 품질을 구현해내는 시스템이 제조사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 이유다.김유태 이미인 SCM본부 총괄은 “공장은 더 이상 제품만 찍어내는 곳이 아니라 데이터가 가치를 만드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며 “20년 전 K뷰티가 제품을 수출했고 10년 전엔 브랜드를 수출했다면, 이제는 제조 혁신을 수출하는 시대”라고 말했다.소재 분야에서도 K뷰티의 강점이 뚜렷하다. 글로벌 화장품 ODM 업체 코스맥스는 최근 ‘코스메틱 바이오파운드리’에 주목한다. 미생물의 균주(특정 성질을 가진 미생물 종)를 발굴하고 개량한 뒤, 효능 평가와 제품 적용까지 한 번에 잇는 연구 플랫폼이다. 윤석균 코스맥스BTI BI랩 상무는 “K뷰티가 장기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뿌리내리려면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값어치 있는 소비를 이끌어내는 프리미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효능을 검증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소성현 한국피부과학연구원 부사장은 뷰티 업계가 ‘개선율’이라는 숫자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개선율은 시험 전 피부 상태, 측정 장비, 피험자(시험에 참여한 사람)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서다. 한국피부과학연구원은 116만건이 넘는 측정 데이터와 1200개 이상 고객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종의 ‘효능 지도’를 구축해뒀다. 소 부사장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일관되게 효과가 나타났는지 제시할 수 있게 마케팅 풍토가 바뀌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규제 대응 능력도 제품력의 일부다. 미국에서는 자외선차단지수(SPF) 기능이 있는 자외선차단제가 일반 화장품이 아니라 일반의약품(OTC)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유효 성분과 함량, 표시 문구, 제조 시설, 품질관리 체계까지 일반의약품 모노그래프(품목별로 정해진 기준)에 맞춰야 한다. 선진뷰티사이언스가 원료 공장과 일반의약품 완제품 공장을 함께 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호 선진뷰티사이언스 대표는 “한국에서 화장품으로 팔고 있으니 미국에서도 화장품으로 팔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성분과 제품의 목적에 따라 미국 세관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해외서 팔리는 만큼, 빨리 보내라글로벌 재고·배송·현지 대응 싸움K뷰티가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큰 배경에는, 판매 채널 변화에 발맞춰 움직인 물류·유통 인프라가 있다. 아마존, 틱톡숍, 세포라, 얼타, 코스트코 등 채널마다 요구하는 입고 기준과 배송 조건, 반품 방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실리콘투는 이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현재 175개국, 7500곳이 넘는 글로벌 바이어(해외 구매·유통 업체)와 연결돼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에는 현지 법인과 물류 거점까지 갖췄다. 현지 재고와 출고, 소매 유통 업체(리테일러) 대응까지 도맡으며 K뷰티의 안정적인 해외 확산을 거든다.알아둘 점은, 글로벌 대형 유통사가 단순히 ‘제품이 인기 있느냐’만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성운 실리콘투 대표는 “아이허브는 미국 현지에 3개월치 재고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며 “월마트와 타겟도 현지 재고를 확보할 자금력과 운영 시스템을 중요하게 본다”고 말했다.다행히 K뷰티는 물류 기반도 탄탄한 편이다. 스타트업 두핸즈가 운영하는 풀필먼트(물류일괄대행·보관부터 포장, 배송까지 한꺼번에 맡아주는 서비스) ‘품고’는 브랜드가 해외 시장을 빠르게 시험하고 넓혀가도록 돕는다. 품고는 여러 국가와 채널의 재고 데이터를 한눈에 모아 보고, 판매 추이에 따라 물량을 유연하게 나눠 보내는 방식을 제안한다. 박찬재 두핸즈 대표는 “물류 통합의 진짜 효과는 재고 데이터를 한곳에서 관리하며 판매 계획을 더 빠르게 손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국내 물류를 대표하는 한진의 존재도 K뷰티 해외 진출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한진은 K뷰티가 글로벌 판매 채널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속도와 현지 대응력을 끌어올린다. 국내 출고지부터 해외 판매 채널, 최종 소비자까지 한 번에 잇는 원스톱 물류 체계를 갖췄다.한진은 물류를 넘어 판매 채널 지원으로도 발을 넓히고 있다. 글로벌 취향 크로스보더 플랫폼(국경을 넘는 거래 플랫폼) ‘훗타운’을 발판으로 일본 역직구 사업을 키우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라쿠텐 등 일본 주요 이커머스 채널에 ‘훗타운숍’을 입점시키고, 훗타운 자사몰과 연계해 K뷰티 브랜드의 일본 진출을 돕는 구조다. 최진호 한진 디지털플랫폼사업본부 전무는 “글로벌 물류 인프라와 디지털 플랫폼, 현지화 마케팅 역량을 결합해 K뷰티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문지민 기자 moon.jimin@mk.co.kr][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65호(2026.06.24~06.30일자) 기사입니다][Copyright (c) 매경AX.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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