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부터 내놓으라’ 앞뒤 바뀐 반도체 투자

입지 타당성 검토 없이 29일 호남 공장 건설 발표할 듯김용범 “투자 규모 워낙 커, 공개될 숫자들 매우 낯설 것”이재용(왼쪽)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4월 23일 베트남 하노이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베트남 기업인 사전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뉴스1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26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방송에 나와 곧 발표될 호남 반도체 투자 규모에 대해 “숫자들이 워낙 커서 ‘이게 진짜냐’ 하는 논쟁이 격화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29일 청와대에서 열릴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 보고회’에서 투자 계획이 공개된다며 “나오는 숫자들이 매우 낯설 것”이라고 했다. 김어준씨가 “삼성이 1000조원을 투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묻자 “그때 보고 판단해보라”고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행사 참석 여부를 조율 중이다. 김 실장은 “정부가 회사들을 쥐어짜서 만드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투자 주체가 세계 1, 2등 기업들이다. 쥐어짠다고 될 기업들이 아니다”라고 했다.김 실장은 앞서 24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해 “용인에 다 지은 뒤 다음 부지를 짓기 시작하면 너무 늦다”고 했다. 그는 “SK하이닉스는 2044년 (용인에) 짓기로 한 것을 10년 당겼는데 더 당겨야 하고, 2048년까지 계획된 삼성도 2034~2035년까지 당겨야 한다”고 했다./그래픽=양진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용인에 수백조 원대 반도체 라인을 짓고 있다. 인허가와 토지 보상 등에 수년이 걸렸고 인플레이션과 인프라 지연 속에 투자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용인 이후’ 단계인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갑자기 들고나와 천문학적 투자액을 기대하는 모양새다. 유력한 호남 입지 모두 정작 인프라는 전무하다.반도체 수퍼사이클을 고려하면 용인 이후에 대한 준비를 앞당길 필요성은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용인 반도체 프로젝트는 현 정부 들어 사실상 멈춰 있다. 토지 보상과 전력 인프라 조성이 늦어지는 탓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용인의 사업 여건을 받쳐줘 속도를 높이는 게 순서”라고 말한다. 일각에선 “정부가 삼성전자의 호남 반도체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용인을 볼모로 삼았다”는 해석도 나온다.용인 클러스터도 속도 못내면서… 천문학적 투자 장밋빛 발표 6개 공장이 들어설 삼성 반도체 용인 국가산단은 전임 정부의 파격적인 패스트트랙 지원으로 2024년 말 국가산단 지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삼성전자는 당초 2026년 말 1호 팹을 착공하고 2031년 준공·가동을 목표로 해왔다. 나머지 5기는 2048년까지 구축한다는 계획이었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의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 부지 모습. /뉴스1 그러나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사업 속도는 급격히 둔화됐다. LH의 토지 보상은 37%만 완료됐다. 전력 확보 문제도 미해결 상태다. 2031년 첫 가동이란 목표를 맞추기 빠듯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업계 일각에선 현 정부가 호남 반도체 유치 의지를 본격화한 시점과, 용인 사업 속도가 느려진 시점이 겹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업계 사정에 밝은 한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는 “호남에 투자하지 않으면 용인도 속도를 내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일반 산단인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는 2019년 시작된 이후 지자체 간 갈등, 환경영향평가 반려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토지 보상 협의가 길어지며 6년이 지난 2025년 2월에야 첫 팹(Fab)을 착공했다. 전력 공급 역시 주민 수용성 문제로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지중화(地中化)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 결과 최초 120조원으로 추산됐던 투자 규모는 그 5배가 넘는 600조원 이상으로 불어났다.SK하이닉스 용인 1기 팹 공사가 진행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현장.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호남 반도체 투자론, 용인 공기(工期) 단축론, ‘삼성전자 1000조원’ 얘기가 줄줄이 터져 나온 것이다. 29일 청와대 ‘3대 메가 프로젝트’ 발표 행사를 앞두고 삼성·SK를 비롯한 참여 기업들은 투자액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은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야 할지 부담이 큰 상황이다. 특히 SK하이닉스 ADR의 미국 상장을 앞둔 SK그룹은 곤혹스러운 처지다. 미국 상장을 진행하면서 향후 투자 계획 등을 현지 증권 당국에 보고한 상황인데, 거기에 없는 새로운 투자 금액을 공표할 경우 자칫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 “인프라도 없는데...”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의 근거가 될 현지 인프라는 전무한 상황이다. 인력과 전력 문제가 특히 심각하다.반도체 전·후공정을 망라한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수천 명의 석·박사급 엔지니어를 비롯해 현장직과 사무직 등 수만 명의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은 높은 보상을 내걸면 인력 수급이 그래도 가능할 전망이다.문제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협력사들이다. 대기업과 급여 차이가 큰 중소·중견 협력업체들은 호남에서 근무할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게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300여 반도체 기업이 있는 충북이다. 수도권과 가깝지만 현지 업체들은 필요 인력의 65.8%만 채용하고 있다는 게 충북인적자원개발위원회 조사 결과다.지역에서 인재를 양성할 교육 인프라도 부족한 현실이다. 광주과학기술원(GIST)의 반도체공학과 정원은 겨우 30명, 전북대 반도체과학기술학과 정원은 80명이다. 배영찬 한양대 공대 명예교수는 “결국 중국 등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데려와 인력 수급을 해야 하는데 독자 기술을 가진 소부장 업체들은 기술 유출을 우려해 외국인 근로자 채용을 극도로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협력사들 인력난 불가피 호남은 총 발전설비 23.3GW(기가와트) 중 47%인 10.9GW가 태양광이다. 관건은 이 전력을 반도체 공장이 필요로 하는 안정적 형태로 24시간 공급할 수 있느냐 여부다. 반도체 전공정 팹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장치 산업이다. 순간적인 전압 변동이나 정전에도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재생에너지의 한계를 보완할 방안으로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이 거론된다. 반도체 공장을 밤새 돌릴 만큼의 ESS를 갖추려면 수십조 원대 투자가 필요하다. LNG 발전도 기후에너지환경부가 탈탄소 목표를 위해 신규 발전소 건설을 갈수록 제한하는 분위기다.전남 영광에는 5.9GW 전력 공급이 가능한 한빛원전 1~6호기가 있지만 2040년대 초반 모두 설계수명이 끝난다. 송전망 부족도 문제다. 당장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도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약 15GW의 전력이 필요한데 확보된 전력량은 6GW뿐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호남과 용인을 연결하는 송전선로를 건설해 약 6GW를 추가 공급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했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전력 공급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제시된 구상으로 보인다”며 “용인에 보낼 전력은 어디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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