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대도 환영" SK하이닉스의 파격…무너지는 반도체 학벌 장벽

[노경은 시사저널e 기자 nice@sisajournal-e.com] 입시는 '간판', 채용은 '실력'…반도체 인재 선발 공식이 바뀐다반도체 계약학과는 서울대급 경쟁…기업은 학벌보다 역량 택했다 반도체 산업이 대한민국 이공계 인재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최상위권 자연계 학생들의 목표는 서울대 자연대와 공대, 의대 진학으로 압축되는데,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취업이 보장되는 반도체 계약학과가 새로운 선택지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대 자연대보다 높은 합격선을 기록하는 학과가 등장하는가 하면 일부 학과는 지방권 의대 합격선과의 격차를 크게 좁히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 인재를 채용하는 기업들은 학력 제한을 없애고 고졸·전문대 졸업자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입시 시장에서는 학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데 채용 시장에서는 학벌의 의미가 점차 약해지는 상반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Gemini 생성 이미지서울대보다 진입 어려워진 반도체학과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입시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반도체 계약학과의 위상 상승이다. 계약학과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대학과 협약을 맺고 장학금과 취업 연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과를 말한다. 학생은 입학과 동시에 취업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고 기업은 우수 인재를 조기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실제 성적은 이미 최상위권 수준에 도달했다. 종로학원이 최근 내놓은 2026학년도 정시 결과에 따르면 주요 대학 반도체 관련 학과의 평균 합격 백분위는 96.2점으로 집계됐다. 서울대 자연계열 평균 합격선인 95.8점을 웃도는 수준이다.대학별로는 한양대 반도체공학과가 98.0점으로 가장 높았다.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는 97.0점,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96.0점을 기록했다.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와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역시 95점 안팎을 기록하며 서울대 자연계열과 비슷한 경쟁력을 보였다. 특히 SK하이닉스와 채용 협약을 맺은 고려대·서강대·한양대 반도체 관련 학과의 평균 백분위는 96.7점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협약을 맺은 주요 계약학과 평균보다도 높게 집계됐다.반도체 계약학과 인기는 단순히 취업 보장 때문만은 아니다. 인공지능(AI) 산업 확산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익성이 개선되면서 이들 기업이 임직원에게 성과급 등 최고 수준의 보상을 보장한 영향이다. AI 반도체 시장 확대에 따른 실적 개선 기대가 이어지면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반도체 기업 입사 자체가 프리미엄이라는 인식도 확산되는 분위기다.반도체 산업에 대한 기대감과도 무관하지 않다. 생성형 AI 확산 이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새로운 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AI 생태계가 확대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했고 이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실제 반도체 업계의 투자 규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호남권과 충청권에 메모리 반도체 생산공장과 패키징 공장을 함께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관련 투자 규모가 최대 300조~400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잇따른다. 반도체 팹 1기 건설 비용이 최소 60조원 안팎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논의는 국내 반도체 투자 계획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AI 반도체 수요 확대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 능력 확충이 이어지면서 고급 기술인력 확보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수험생들이 바라보는 반도체는 단순한 전공이 아니라 성장성이 높은 산업인 셈이다. 서울대 간판보다 산업의 성장성과 취업 안정성을 선택하는 학생이 늘어나는 배경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입시 시장에서는 서울대를 넘어설 정도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기업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Gemini 생성 이미지정작 기업들은 "졸업장보다 역량"SK하이닉스는 이달 중순 진행한 신입사원 수시채용부터 기존 채용 공고에 포함됐던 학력 요건을 삭제했다. 이에 따라 설계와 연구개발(R&D), 소자 등 기술 사무직 분야에도 고등학교 졸업자와 전문대 졸업자가 지원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이 사실상 학력 장벽을 허문 셈이다. 이번 변화는 단순한 채용 제도 개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반도체 기업들이 인재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여서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학력 중심 산업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설계와 연구개발 인력 대부분이 주요 대학 공학계열 출신으로 채워졌고 기업들 역시 우수 대학 인재 확보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반도체 계약학과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제도다.하지만 AI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기업들의 고민도 달라지고 있다. 기술 변화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배운 기술이 금세 구형이 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보다 얼마나 빠르게 배우고 적응할 수 있느냐'라는 판단이 커지고 있다.실제 최태원 SK 회장은 최근 미래 인재가 갖춰야 할 핵심 역량으로 '생각·적응·공감'을 강조했다. 스스로 질문하고 본질을 파고드는 능력, 새로운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다양한 구성원과 협업하는 능력이 미래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글로벌 기술기업들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일부 직무에서 학위 요건을 폐지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학력보다 프로젝트 경험과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방향으로 채용 체계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반도체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AI 반도체 경쟁이 격화될수록 기업들은 더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특정 학력 기준만으로는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기술 변화 주기가 빠른 분야다. HBM 이후 차세대 메모리와 AI 반도체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정형화된 인재보다 새로운 기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인재 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결국 반도체 산업이 만들어낸 변화는 생산라인보다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얼마나 빠르게 배우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며 "계약학과에는 최상위 학생이 몰리고 있지만 정작 기업들은 역량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입시 시장과 채용 시장에 기묘한 미스매치가 나타나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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