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표행위냐, 균형발전이냐’…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논쟁의 ‘진짜...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딜라이트에 전시된 반도체 웨이퍼에 서울 도심 모습이 담긴 사진이 비춰지고 있다. 이준헌 기자‘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을 둘러싸고 산업계를 넘어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과 ‘정치 논리’, ‘호남 입지 장단점’ 등을 둘러싼 논쟁이 격돌하는 사이에서 그 이면에는 글로벌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을 앞둔 기업들의 냉정한 손익계산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관련 대기업들의 ‘호남행’이 단순한 정권의 등 떠밀기로만 볼 수 없다는 얘기도 적지 않다. 기존 클러스터인 경기 용인의 전력·용수 고갈과 영남권의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대응 한계 등이 역설적으로 청정에너지가 남아돈다는 호남을 대안 거점으로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다. 결국 이번 논쟁의 본질은 시혜적 안배가 아니라, ‘초순수’ 확보와 인재 유치라는 약점을 보완해 국가 반도체 영토를 확장하려는 ‘산업적 생존 전략’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정치권의 공방 속에 삼성·SK는 고심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지난 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24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용인 클러스터의 전력 한계가 임계점에 도달한 만큼 제2 클러스터 조성이 시급하다”며 호남 유치에 군불을 떼고 나서자 여야는 이 문제를 놓고 충돌했다. 여당은 “수도권 집중을 막고 국가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한 결단”이라며 조속한 예산 집행을 요구한 반면, 야당은 “인프라도 인력도 없는 곳에 수백조원의 대기업 투자를 강제하는 것은 과거 정부의 정치 논리를 반복하는 매표 행위”라며 맞섰다. 그러자 지난 27일 이재명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SNS를 통해 “용수 부족이나 인재 확보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며, 국가가 책임지고 초순수 정수 인프라와 거점대 장학 생태계를 조성할 것”이라며 호남 유치 당위성을 정면으로 엄호하고 나섰다.정치권의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비화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고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회사는 수도권 중심의 기존 마스터플랜을 유지하면서도, 전력난과 RE100 규제를 돌파하기 위해 비수도권 신규 거점을 다각도로 검토하는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왔다. 시장 일각에서는 석·박사급 인재들이 내려가지 않으려 하고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물마저 부족한 곳에 무리하게 팹(반도체 생산공장)을 짓는 건 기업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두 회사로선 복잡한 손익계산을 하는 분위기다. 정권의 등 떠밀기에 밀려 움직이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앞두고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어딘가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어야 하는 두 회사 입장에선 입지를 조목조목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전력·용수 고갈된 수도권, RE100 한계 부딪힌 영남권수도권 우위론자들이 내세우는 최대 강점은 압도적인 인재 선호도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대표적인 허브로 꼽히는 용인 클러스터는 이미 전력과 용수 고갈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다. 용인 클러스터 가동에 필요한 전력은 원자력발전소 5기 분량에 달하는 5억5000만kW 수준이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수도권 내에 발전소를 추가로 짓는 것은 주민 반발과 환경 규제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수도권에서 생산한 전기를 끌어오려 해도 변전소나 송전탑 하나를 세우는 데 수년에서 십수 년이 걸리는 ‘송전망 포화’ 상태다. 땅값 상승과 지자체 간 인허가 갈등으로 용인의 착공이 계속 늦어지는 사이 기업의 기회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그렇다면 영남권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대구·구미 등 영남권 기존 산단은 도로와 기본 인프라가 훌륭하고 확장성이 좋다는 장점이 뚜렷하다. 원자력발전 중심의 전력 공급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발목을 잡는다. 애플, 엔비디아, 구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강력히 요구하는 RE100 기준이다. 영남권은 전통적인 화력발전과 원전 비중이 높아 대규모 신재생에너지를 조달할 만한 부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영남에서 만든 반도체는 향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될 리스크를 안게 된다.“전기 있는 곳으로 가자”… 호남의 역발상과 속도전이 지점에서 호남권의 역발상이 기업들의 실리 계산기에 맞아떨어진다. 전남은 전국에서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잠재량이 가장 많은 영토다. 전기가 너무 남아돌아 한국전력이 강제로 발전을 멈추는 ‘출력제어’가 연간 수십 회 이상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낼 길은 막혔으니 전기가 있는 곳으로 공장이 내려오라는 청정에너지 공급망 논리다. SK그룹이 에너지 계열사를 총동원해 신재생에너지 자원과 반도체 생산을 묶는 풀스택 투자를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만 무성하고 규제에 묶인 수도권보다 토지 보상 리스크가 적고 대규모 부지를 즉시 확보할 수 있는 호남이 사실상 이들 기업의 낙점을 받은 배경으로 꼽히는 이유다.초순수 수질 미달과 ‘인재 남방한계선’이라는 걸림돌물론 호남 입지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수도권·영남권 우위론자들의 반론도 무시할 수 없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초순수 수질이다. 반도체 전공정에는 웨이퍼를 세척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극도로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유력 후보지 인근인 영암호 등의 수질은 반도체용 초순수를 생산하기에 원수 기준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정수시설 구축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과 지자체의 부담이 된다. 주암댐 가뭄 시 발생할 수 있는 용수 공급 안정성 문제 역시 한강 수계를 쓰는 수도권이나 낙동강 댐들을 낀 영남권보다 확실히 취약한 조건이다.‘인재 남방한계선’이라는 현실적 장벽도 여전히 높다. 공장 건물은 정부 지원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지만 석·박사급 설계 및 공정 엔지니어들이 광주·전남까지 정착하려 하지 않는다면 라인 가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영남권은 포스텍을 필두로 경북대, 부산대 등 탄탄한 지역 거점 국립대 이공계 생태계가 수십 년간 자리 잡았다. 반면 호남권은 반도체 전문 인력 공급 생태계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아무리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국유재산 사용료 100% 감면 카드를 던져도 인력 매칭이 안 되면 기업으로서는 모험일 수밖에 없다.‘시혜적 균형발전’ 아닌 ‘냉정한 손익계산서’ 필요할 때정치권의 공방은 뜨겁지만 결국 핵심은 국가 기간산업의 ‘지속 가능한 생존’이다. 이번 논쟁은 단순히 낙후된 지역에 공장을 짓는 시혜적 균형발전론으로 접근하면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도권의 전력 악몽을 피하고 RE100이라는 글로벌 무역 장벽을 돌파하기 위해 기업이 호남의 영토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구조적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슈퍼사이클을 앞두고 소모적인 정치 논리를 걷어내고 초순수 용수원 보완과 인재 유인책이라는 확실한 손익계산서를 기업 테이블에 올려놓을 때”라고 입을 모은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인프라 약점을 메우는 냉정한 실리주의만이 국내 반도체의 영토를 넓히는 유일한 열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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