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라운드 줌인]① 산은, 부실기업 최후보루에서 K벤처 '심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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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과거 부실 대기업과 기간산업을 떠받치던 최후 보루에서 인공지능(AI)·우주항공·딥테크 스타트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벤처 생태계의 핵심 출자자(LP)로 전환했다.대기업의 자체 회복 능력이 커지면서 산업은행이 부실을 떠안아야 할 구조조정 수요는 줄었다. 반면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신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정책금융의 역할은 더 커졌다. 산업은행의 변신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라 한국 산업전략의 변화로 읽힌다.대기업 체력 커지자 '국가급 구조조정' 줄어산업은행은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맡았다. 1954년 설립 이후 장기 시설자금을 공급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중심에 섰다. LG카드(현 신한카드), 금호, 동양, STX,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등 굵직한 기업 위기 때마다 산업은행은 채권단의 중심축이었다.2000년대 초반에는 대기업 한 곳의 부실이 금융시장과 산업 생태계 전체로 번질 수 있었다. 일례로 2002년 발생한 LG카드 사태 당시 채권을 인수하려는 금융기관이 전무해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때 산업은행은 도미노 파산을 막는 마지막 안전판 역할을 했다.다만 최근 10년 사이 흐름은 달라졌다. 2015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 이후 국가 경제 전체를 흔들 만한 초대형 구조조정 이슈는 크게 줄었다. 2023년 태영건설 부도 위기 등 국지적인 구조조정은 있었지만 과거처럼 산업 전반의 붕괴 우려로 번지지는 않았다.산업은행 넥스트라운드실 관계자는 최근 화학산업 부진을 예로 들며 구조 변화를 분석했다. 그는 "에틸렌 등 범용 화학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화·SK 등 모기업이 방산이나 반도체 등 다른 부문에서 돈을 벌며 버티고 있다"며 "기업들의 자체 수혈 능력이 커지면서 은행이 부실채권을 떠안아야 할 필요성도 줄었다"고 말했다.미·중 기술전쟁 속…벤처 육성 '생존 전략'산업은행이 2015년을 전후로 스타트업 펀드 출자와 직접투자에 힘을 싣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변화와 맞물린다. 구조조정 수요가 줄어든 사이 인공지능(AI)·우주·반도체·2차전지 등 신산업의 중요성은 커졌다.산업은행 관계자는 현재를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한 시기로 분석한다. 18세기 증기기관 중심의 1차 산업혁명, 19세기 후반 석유와 전기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혁명에 이어 이제는 AI가 세상을 뒤바꾸는 기술적 변곡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문제는 한국의 위치다. 중국은 범용 화학, 조선, 2차전지, 전기차 등 제조업에서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미국은 AI와 우주를 중심으로 기술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이 양국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제조 경쟁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결국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이 신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유럽이나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을 겪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다. 산업은행은 미·중 밸류체인 양쪽에서 한국이 모두 필요로 하는 국가로 살아남기 위해 유망 벤처 기업을 육성하고 초격차 기술을 창출하는 방향 전환을 이루고 있다.미국과 중국 사이 '하이브리드 투자' 이끈다산업은행은 한국 시장 규모에 맞는 '하이브리드 공공 투자' 모델을 택했다. 미국식 시장 모델과 중국식 국가주도 모델을 그대로 따르기 어려운 한국 벤처 생태계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미국은 부실기업이 발생하면 시장 논리에 따라 정리하고, 벤처캐피탈(VC)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유망 기업을 고른다. 반면 중국은 국가가 대형 은행과 정책자금을 움직여 신산업을 국가주도적·계획적으로 키운다. 벤처시장 규모가 미국만큼 크지 않고, 중국처럼 국가가 금융을 전면 통제하기도 어려운 한국은 두 모델 모두 맞지 않다.이에 산업은행은 국내 최대 규모의 출자자(LP) 지위를 활용해 민간 VC가 스타트업에 투자할 수 있는 판을 까는 방식을 택했다. 특정 대기업 계열사를 정책자금으로 직접 지원하면 특혜 논란이 불거질 수 있지만, 신산업을 이끌 스타트업 생태계에 공공 자본을 공급하는 방식은 정책 명분과 시장 수용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넥스트라운드실, 공공 벤처 플랫폼 주도한다이 같은 전환을 이끄는 조직이 산업은행 넥스트라운드실이다. 넥스트라운드실은 2016년 벤처실 기획팀 산하 기업설명회(IR)의 플랫폼 업무에서 출발했다. 이후 벤처 생태계 내 역할이 커지면서 2019년 단독 부서로 공식 출범했다.넥스트라운드실의 핵심 기능은 유망 스타트업을 선제적으로 발굴하고 민간 자본과 연결하는 데 있다. 산업은행이 직접 모든 기업을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정책금융이 시장 마중물이 되고 민간 VC가 후속 투자와 검증을 이어가는 구조다.결국 넥스트라운드실 확대는 산업은행의 역할 변화를 상징하는 조직 개편으로 읽힌다. 과거 산업은행이 부실 대기업을 수술대에 올려 살리는 구조조정 기관이었다면, 이제는 기술기업과 민간 자본을 연결하는 공공 벤처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구조조정의 최후 보루였던 산업은행이 K-벤처 생태계의 심장으로 역할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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