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영남권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정부지원 받았던 이유

[이승만 시대별곡] 뿌리 깊은 호남경제 차별▲ 김성수와 이승만. 1948년 대통령선거 이전까지는 사이가 좋았다.ⓒ 위키미디어 공용호남은 오랫동안 첨단산업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호남이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차별'과 함께 연상될 때가 많았다.호남보다 더한 차별을 받는 곳들은 항상 있었다. 호남 차별은 영남이나 수도권과의 상대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의 호남 차별은 박정희 집권기에 특히 심했지만, 이승만 집권기에도 결코 적지 않았다.초대 주한미국대사인 존 무초(재임 1949~1952)는 5·30총선을 앞두고 딘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1950년 5월 27일 자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에서 무초는 "민주국민당은 그들의 요새인 전라도에서 대체로 현재의 우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될는지 모르나, 다른 지역에서는 고전하게 될 것 같다"고 선거 결과를 전망했다.이 시기에 가장 강력한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이다. 전북 고창 출신인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한민당은 1948년 대통령선거 때는 이승만을 밀었지만 김성수가 총리직을 확보하지 못한 일을 계기로 이승만과 틀어졌다. 이 악연은 그 뒤 한민당 계열 정당들이 반이승만 노선을 표방하는 원인이 됐다.그 같은 한민당 계열 정당들의 최대 거점이 위 보고에 나타나듯이 호남 지방이었다. 이런 이유에서도 호남은 이승만의 미움을 살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박정희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이승만 때도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 호남은 장관 임용 면에서도 낮은 대우를 받았다.역대 장관 인적 사항 분석 결과곽진영 건국대 교수는 <의정연구> 2017년 제52호에 실린 '역대 장관 충원 패턴의 변화'에서 박근혜 정부 때까지의 역대 장관 844명의 인적 사항을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하의 전라도 출신 장관은 11.2%이고, 경상도 출신 장관은 35.4%였다. 이 비율이 김영삼·이명박·박근혜 때는 15.1% 대 31.8%이고. 김대중·노무현 때는 28.8% 대 29.5%였다.이에 비해, 12년간 유지된 이승만 정권과 9개월간 유지된 장면 정권 때를 합하면 전라도는 9.6%, 경상도는 21.8%였다. 다른 시기에 비해 경상도의 비율도 낮지만, 전라도의 비율도 낮았다. 이 시기의 호남은 수도권(25.9%), 이북(23.4%), 충청(14.2%) 다음이었다.호남은 자유당 창당에서도 소외됐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자유당 창당을 주도한 그룹이 지방토착세력 및 신흥 상공인들과 더불어 경기·강원·충남·경북 정치세력이었다고 알려준다. 정부뿐 아니라 집권당 내에서도 호남의 목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 시기에 호남 차별이 두드러진 또 다른 분야는 산업 투자다. 한국의 산업 지형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 국제협조처(ICA) 자금을 비롯한 원조자금이 지역별로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확인하면 그것이 명확해진다.한국 경제를 주도하는 산업이 지금은 반도체·자동차·조선업 등이지만, ICA 자금이 대거 투입된 1950년대 중후반에는 이른바 삼백산업(三百)이었다. 흰색의 이미지를 띠는 제분·제당·면방직업이 이 시기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당시, 원조자금을 받는 삼백산업 기업들은 수도권이나 영남권에 집중돼 있었다. 1959년 10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은 "대한·극동·부국 등 각 제분시설에는 수십만 불의 원조자금이 투입"됐다고 말한다. 대한제분의 공장은 인천에 있었고, 극동제분과 부국제분의 공장은 부산에 있었다.제당산업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2면은 제당기업들이 미국 원조자금을 밑천 삼아 미국산 원당을 구매하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원당의 실수요자가 현재로서는 제일제당·동양제당·삼양사 그 외에 군소 공장이 2개처 있으나, 그 대부분이 전기(前記) 3개 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제일제당의 부산공장과 삼양사의 인천공장에 원조자금이 들어갔음을 알려주는 보도였다.호남 기업들도 원조자금을 어느 정도 받았지만, 여타 지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금 분배를 정부가 결정했으니, 호남이 이 시기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소외돼 있었던 것은 명확하다.이 당시에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냉온탕을 오고가는 일이 자연스레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삼양그룹과 삼성그룹의 역전이다.삼양그룹과 삼성그룹▲ 전북 고창에 있는 김성수의 생가ⓒ 연합뉴스친일파 김성수·김연수 형제로 대표되는 삼양그룹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이었다. 1970년 7월 3일자 <매일경제> '뉴코리아 (14): 기업집단'은 "삼양사·삼양설탕으로 대표되는 삼양그룹은 토착민족자본으로 언론에까지 손댄 원로"라며 "지금은 그 권좌를 양보했지만, 한때는 민족자본을 대표하는 재벌이었다"고 평한다.친일파 집안의 기업이 민족자본으로 불리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 소유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불릴 수도 있었다. 일제강점하의 대표적 민족자본이라는 과분한 칭호까지 받았던 삼양그룹은 친일파가 여전히 득세하는 해방 이후에 크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쇠락했다. 위 <매일경제>는 "삼양의 권좌를 무너뜨린 것이 삼성그룹"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삼양을 그렇게 만든 실제 장본인은 정권이었다.이승만은 삼양을 싫어했다. 김성수 가문의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와 사회> 2004년 제64호에 실린 김주환 경기대 교수의 논문 '한국사회 재(財)-재 갈등의 언(言)-언 갈등으로의 전환'은 "삼양과 삼성의 이익 대립하에서 승자를 결정한 것은 자율적인 시장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의 차별적 개입이었고, 그 정치적 배경은 최고 통치자의 재벌에 대한 선호 여부였다"고 말한다.이승만은 삼양을 무너트리기 위해 이병철을 지원했다. 위 논문은 "이승만의 선호는 삼양 배제와 삼성 지원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미국 원조자금이 호남보다 수도권·영남에 더 많이 쓰인 데는 산업구조적 측면도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업 기반이 크게 파괴된 상황에서 원조자금 투입의 효과가 신속히 나타나게 하려면 농업이 강한 호남보다는 수도권이나 영남에 투자하는 게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렇게 합리적 판단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삼양그룹과 삼성그룹의 역전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경제 상황이 다급해 새로운 것을 키우기보다 기존의 것을 보강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면, 기존의 강자인 삼양그룹을 굳이 억누르고 삼성을 육성할 이유가 없었다. 이승만 집권기의 경제현상을 살펴볼 때는 대통령의 개인적 호불호 같은 비합리적 요인도 체크하지 않을 수 없다.이승만이 가장 경계한 제도권 정당은 한민당과 그 계열 정당들이다. 이 계열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이승만을 꺾을 수도 있음을 증명했다. 1948년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이 계열은 1960년에는 4·19에 편승해 이승만을 몰아냈다. 이 계열은 이승만에게 오랫동안 당했지만, 결국에는 이승만을 꺾었다. 그런 힘을 갖고 있었으니, 이승만이 그들을 경계할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그런 한민당 계열의 최대 기반은 호남이었다. 김성수와 더불어 한민당 창당의 또다른 주역인 송진우는 전남 담양 출신이다. 이 당의 핵심 세력도 호남 지주들이었다. 1963년 11월 1일자 <경향신문> '주요 정당의 성분·계보'에 "호남 토착지주계급의 민국당"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승만과 맞서는 정당의 주축이 호남인들이었으므로, 이승만 집권기의 호남경제 차별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고 볼 수 있다.경공업 성장이 강조되던 1950년대에 호남은 경공업 육성에서 소외됐다. 다른 시기에 비해 호남 출신 장관도 적고 원조자금도 적게 배분됐다. 박정희 때만큼은 아니어도 이승만 집권기의 호남 차별도 상당한 편이었다.
원문 보기 ↗